1918 | 1월 1일 대구시 대신동에서 부친 백경철(白慶喆)씨와 모친 박분이(朴紛伊)여사의 맏딸로 태어남. |
---|---|
1920 | 3월 17일 여동생 복수(福壽) 태어남. |
1922 | 부친 백경철씨 별세. 6월 13일 막내 동생 복술(福述) 유복녀로 태어남. 어머니 박씨부인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감. |
1924 | 4월 대구여자보통학교에 입학. |
1929 | 7월 보통학교 5학년 때 가정 형편으로 스스로 그만둠. 사과행상을 하면서 어머니를 도움. |
1931 | 일인(日人)이 경영하던 일신당 백화점에 점원으로 취직함. 야간학교에 편입을 했으나 졸업반 때 다시 그만둠. 이때부터 자신처럼 불우한 학생을 위해서 육영사업을 하기로 어머니와 함께 결심함. |
1933 | 삼 년간의 점원생활 청산함. 새로 생긴 당구장에 자리를 옮김. |
1935 | 연주나래로 병원에 입원. 치료비로 재산을 모두 날리고 100원의 부채까지 짊어짐. |
1936 | 다시 사과행상과 노점을 시작함. |
1937 | 간이식당을 차림. |
1941 | 대구시 대신동 153번지에 한옥을 구입,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함. |
1942 | 서문시장에서 해산물 소매상을 차림. |
1945 | 양곡 도매상을 차림. 해산물 소매상과 동시에 경영함. |
1954 | 모친 박분이 여사 별세. 식당을 판 40만환 학교기금으로 쓸 것을 유언함. 부동산 임대업과 대구인단비누 공장 공동으로 운영함. |
1956 | 2살난 박태자(朴太子) 양녀로 입양시킴. |
1958 |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11-24번지로 이사를 옮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동안 이곳에서 기거함. 1958년∼1978년 서울로 온 여사는 사업적 수완을 마음껏 발휘, 부동산 대여업과 주식에 손을 댐. |
1975 | 5월 당시 문교부장관 민관식씨를 예방하고 학교설립을 도와 줄 것을 요청함. |
1977 | 8월 경희의료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음. |
1978 | 1월 31일 故박정희 대통령께 학교설립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올림. 4월 29일 학교법인 금옥학원 설립 허가 받음. 초대 이사장 취임. 5월 대구 법성사에 모신 어머니 영전 앞에서 학교설립을 보고, 이 자리에서 금옥장학회의 구상을 발표함. 11월 13일 서울대학병원에 간암으로 다시 입원함. |
1979 | 2월 21일 금옥학원 기공식에 사경의 몸으로 참석 첫 삽질함. 이 자리에서 금옥학술문화재단 설립의 뜻을 밝힘. 2월 26일 재단법인 금옥장학회 설립 허가 받음. 초대 이사장에 취임. 3월 23일 국민훈장 동백장 받음. 4월 13일 신문을 보고 찾아온 막내 동생 복술 여사와 극적으로 상봉함. 4월 25일 재단법인 금옥학술문화재단 설립인가 받음. 초대 이사장에 취임. 5월 1일 지병인 간암으로 향년 61세로 별세함. 유언에 따라 금옥학원 뒷 동산에 안장됨. 5월 3일 교육공로로 사학재단 연합회에서 봉황장을 받음. |
1981 | 5월 16일 제16회 5·16민족상 교육부분 본상 수상. |
본 재단 설립자이신 故 곤계 백금옥 여사께서는 어린시절 편모슬하에서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한 소녀 가장으로서 굳은 의지와
근검, 절약과 피 눈물 나는 노력의 일생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어릴때부터 가슴에 품었던 한과 꿈인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기관인
금옥중학교, 금옥여자고등학교, 금옥장학회, 금옥학술문화재단을 세우는 육영 사업을 하신 분으로,
이와 같이 그 분의 숭고한 정신과 생애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꿈과 희망을 부유한 사람에게는 세상을 어떻게 사는 길이 참다운 삶의 모습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본 재단에서 지급되는 장학금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배우고자 하는 전국의 소년, 소녀 가장 및 대학생, 대학원생을 선정,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故 백금옥여사의 숭고한 정신을 한층 승화시키고 그 유지를 받들며 유업을 영원히 유지 발전시키고자 하는 뜻과 수혜 소년, 소녀 가장, 대학생,
대학원 장학생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어 좌절하지 않고 배움에 정진토록 격려하고자 함입니다.